신기루 속에 갇힌 기분, 정신적으로 더 고양된 느낌,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영적 무중력 상태….
우리는 기독교신앙이 이럴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래서 범상으로부터의 일탈(逸脫) 정도는 되어야지 일상의 평범한 반복이면 그건 신앙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기독 신앙이 그런 거야 한다면 그런 식의 기독교는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겐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신앙이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닌 ‘딴 세상’의 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련해 사실 가장 혼동 가능성이 큰 대상은 바로 목사다.
이런 도전적인 질문들을 한 번 던져보자.
목사는 왜 목사인가? 원래 목사여서 목사인가? 아니면 목사는 후천적으로 계발된 직책일까?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자격을 가진 자여서 하나님이 그를 목사로 부르신 건가? 아니면 신학교 졸업했으니까 그냥 목사가 된 건가?
나로서는 이런 질문과 답변 사이의 갈등을 가장 치열하게 경험했던 곳은 목사 후보생들이 모인 신학교였다.
난 그때, 내 자신의 사역자적 한계를 애써 은닉시키면서 다른 동료들은
안 그럴 거라고, 또 남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저들에게는 뭔가가 있겠지, 딴 세상서 살다가 여기 온 거겠지, 식의
무의식적인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허물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같이 공부하며, 같이 밥 먹으며, 같이 기숙사생활 하며, 특히 같이 족구(운동)하면서 그들 역시 크게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들은 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어떤 교단의 경우는 아예 제도적으로 그들의 위치를 보통 사람들(교인들)로부터 철저히 분리시켜 놓는다.
그 교단은 목회자(사제)의 위치를 신의 대리자 정도로 격상시켜,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신앙 세계에 범접하기 어려운 구조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만 했을까?
그렇게 한다 했을 때 목회자는 한 순간에 본질이 다른 저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게 정직한 대답일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청교도로 불리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목회자들을 향한 일침과 격려의 변이다.
“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면 제대로 말할 수도 없고 설교할 수도 없습니다. 설교의 위대함은 항상 주제의 위대함에 좌우됩니다. 어느 영역이든 주제가 위대하면 연설도 위대하기 마련입니다.”
설교가가 왜 위대한가? 그 사람 자신이 위대해설까?
목회자가 왜 일반 교인들과 다를까(달라야 할까)? 원래 달라서 다를까?
그들은 애초부터 다른 이들보다 어떤 신성의 탁월함을 더 많이 갖고 태어나서일까? 아니면 그런 것들을 계발해낼 능력을 잘 배워서일까?
아니면 앞서 말한 한 교단에서처럼 그런 권위를 제도적으로 부여해서일까? 이에 대한 정답은,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그들이 다루는 주제가 워낙 위대해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표현되었다. 바로 기쁘고 복된 소식, 복음이다. 설교가가 위대한 것은 그런 복음을 강단에서 열렬히 선포하는 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참 많다.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말도 들린다.
그래서 교회와 신앙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그런 염려들을 일거에 물리칠 수 있는 최고의 소식이 있다.
십자가의 복음이다. 설교가, 목회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들 역시 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다르다. 왜인가?
그들이 매주일 강단에서 외치는 주제가 위대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주제를 전달하는 메신저들이여! 힘을 내시라!
우리 목사들에게는 목청 높여 전달해야 할 인류 최고의 주제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다.
(새크라멘토 교역자 협의회장 김숭목사님의 글을 제목과 함께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 다음에서 종교 칼럼으로 내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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